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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인 듯, 그림 아닌, 그림 같은… XR 시대 미술관 가이드

‘카메라’라는 기술이 발명되자 미술계에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사실일 것입니다. 이미지를 복제하는 기술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이 맞춰진 후 미술계의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원본성’에 대한 논쟁을 지속해왔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벽에 걸린 원작을 넘어 그 그림이 걸린 공간, 아우라 등 다양한 미학적 담론으로 확대되어 왔습니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화가인 존 버거는 자신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양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출처: 예스24
“때로는 그림을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두 장소에서 동시에 볼 수는 없었다. 카메라가 어떤 그림을 복제하면, 그 이미지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그 결과 그 이미지의 의미는 변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가 여러 가지로 늘어나고 많은 의미들은 조각조각 나누어진다.”(pp.24-5)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복제물도 이 점에서는 원작을 따라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p.37-8)
위 텍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보수적인 미술계 사람들은 기술로 인해 복제된 작품들을 비판해왔습니다. 작품을 단순 이미지, 시각적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품고 있는 모든 것들, 작가의 제작의도와 시대성, 계급, 작품이 걸려있는 장소 등을 다 종합한 것이 작품의 아우라인데 기술 복제로 인해 이 아우라가 파괴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담론에 한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이러한 아우라는 과연 파괴되는 것일까요? 오히려 이런 파괴와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이 가능한 게 아닐까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도판 1) ‘Girl with a Pearl Earring’, Hurriyet Daily News
(도판 2) 10 기가픽셀 화면으로 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www.engadget.com
(도판 3) 인공지능으로 재구성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카이스트 누리집
이 세 사진은 모두 동일한 작품,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걸작으로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입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네덜한드 미술관에 전시된 원본(도판 1), XR 기술로 스캔하여 인터넷 상에 제공된 그림(도판 2), 마지막은 카이스트 <인공지능과 예술> 심포지엄에 사용된 포스터입니다 (도판 3). 또 위 그림은 구글에서 제공하는 VR 서비스 ‘구글 포켓 갤러리’에서 침대에 누워 감상할수도 있습니다.
총 세가지의 장면이 관객인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린 작품 (도판 1)을 진품, 나머지 작품 (도판 2, 3)을 패러디 혹은 원본이 아니라고 느낄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보편적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내가 이 그림의 구도, 색상, 형태를 보고 좋다와 싫다의 반응으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이미 선행된 미디어에 제시된, 작품을 바라보게 하는 틀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즉 ‘바라보기’에 대한 권력에 잠식당한 것입니다.
수학, 과학과 달리 모호성이 강한 시각적 학문인 미술은 텍스트의 힘을 많이 받습니다. 전시회에서 작품 캡션,서문, 도슨트 해설을 통해 명확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그것입니다. 존 버거는 이를 통치의 과정이자 ‘신비화’라 일컫습니다.
이미지의 핵심을 흐리는 이 ‘신비화’는 XR 시대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작동할까요? 비평가와 전공자의 권위를 더욱 굳건히 할까요? 아니면 미술 감상에 있어 다양한 계급의 바라보기 방식을 유입하도록 도와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기술의 예술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것일까요?

XR 시대 미술관 감상 가이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기술매체가 이끌어낸 미학적 변화 속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벤야민은 매체 예술에서 미학적 생산과 탐구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닌 기계장치임을 주장합니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뉴미디어 아트의 복제가 익숙한 지금, 벤야민의 주장과 빗대어 보자면 우리는 더이상 공예적 예술작품이 아닌 기계가 찍어낸 산물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린 XR 작품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DATABASE PAINTING SERIES 1 –STOLEN DATA, ANIMAL TOTEM, APES #001999Original Resolution: 2500 x 1781, Tools Used: Son Joy’s 386PC computer image data from kindergarten school education, Magic 3D coloring book, Cheetah, Photoshop.Full Size: 3,785,359.26 bytes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예술 작품이 기계로만 제작되었는지, 작가의 손과 붓에서만 탄생되었는지는 단순한 제작 과정이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제작 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바라보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즉, 최신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반영하여 단 몇분 만에 작품을 뚝딱 만들어냈다거나, 한 작품을 다양한 기술로 복제해 동시에 여러 물리적 공간에서 전시한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이는 초반에 언급한 예술작품의 ‘아우라’ 개념의 확장을 이끌어내줍니다. 물리적 붓터치, 즉 오직 마띠에르만이 미술관에서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면, 기술과 디지털 정보로 이루어지는 ‘요즘 시대’의 예술 작품 이미지는 유동적으로 아우라의 범위를 넓힙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공간, 편집되고 다방향적인 시간, 작품과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는 관중 등 다양한 외부 요소들이 작품의 아우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XR 작품이 원형적으로 같은 작품이라도 이 작품이 전개되는 시공간은 완전히 다르고, 또 이 작품을 감상하는 나와 너가 겪는 경험은 현저히 다르기때문에 그 작품의 본질성과 아우라는 보존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만의 그림 감상 교양 찾기

XR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이미지 데이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2 년 내에 생산된 데이터는 지난 인류의 역사 동안 생성된 모든 데이터보다 많다고 합니다. 1 분마다 트위터에서 5 만 트윗이, 유튜브에서는 약 500 시간어치의 영상이 업로드 된다고 합니다. 이런 데이터 과잉의 시대에서, 조금 더 교양있고 풍부하게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첫째, 그림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과거 가이드라인 밖에서 벽에 걸린 평면 회화를 응시하는 것과는 달리 미디어아트의 가장 큰 감상 특징은 기술을 이용해 관람자와 작품의 상호작용이 원활하다는 것입니다. 다채로운 기술이 접목된 작품은 관객의 신체 확장적 경험을 가져다 주기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험을 선사 하기도 합니다. 부끄러워 말고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보세요. 본인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내용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작품의 화룡점정이 되는지,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으로 이끄는 안타까운 행보가 되는지 결정하는 것은 형식이 아닌 내용입니다. 생각의 범위를 넓혀주는 기술을 사용해 때로는 어리둥절한 작품에 쉽게 지나치지 마시고, 작가가 숨기려고 한 현학적 질문을 찾고 본인만의 명제를 결합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어려워 하지 마세요. 하루가 멀다하고 업데이트되는 기술과 딱 맞아 떨어지는 정답을 드러내지 않는 예술의 만남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의 의견에 가장 열려있는 분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즘’인 지금은 정답의 유무를 넘어 정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도 여러분에게 온전히 맡긴답니다. 물론 조금 더 다수의 공감을 얻는 정답은 있겠지만, 오답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주 선 예술작품 앞에서 우연히, 즉흥적으로 또는 충동적으로,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상도 XR 시대 예술작품에서는 아우라로 작동할 것입니다.
미술관에서 교양 넘치는 사람 되는 법, 생각보다 쉽죠?
[작성자: 김지영]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