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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플라뇌르: 가상 공간 신인류의 역할

디지털 플라뇌르: 가상 공간 신인류의 역할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부터 동시대의 인류까지, 약 360만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걷는 행위’입니다 . 자동차, 지하철, 자전거… 기술이 발전해도 우리는 모두 걸으며 공간을 누빕니다.
플라뇌르flâneur 개념의 창시자라 볼 수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보들레르는 위 개념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숨어있어야 하는 존재’라 정의했습니다. 프랑스어로 ‘산책자’를 뜻하는 플라뇌르는 도시 사이를 익명의 존재로 누비며 공간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경험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이 있기에 근대 도시는 단순한 산업 노동의 공간에서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 즉 감상하고 관조 가능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포스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 우리 인류는 기술의 발전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플라뇌르로써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요? 가상 공간에서 디지털 플라뇌르는 어떤 신인류일까요?
기존의 가상 공간은 물리적 도시와 달리 맵 너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우리가 ‘탑건’ 영화를 볼 때 톰 크루즈가 모는 비행기에서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지만, 메타버스 속 바다 너머에 누가,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해졌습니다. 바로 그 점이 가상 공간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뚜렷해질수록 가상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신뢰성이 증가하고 이질감이 줄어듭니다.
가상 공간은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실 공간과 대립하는 이분법적 공간이 아닌 확장된 도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가짜’가 아닌, 특별한 목적 없이 스스로 작동하는 유기체이자 하나의 2차적 자연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의 탐구를 위해서는 플라뇌르의 역할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해졌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메타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익명이지만 주체적으로 공간을 탐색하고 기억과 흔적을 기록하는 산책자들. 이들이 바로 가상 공간의 진실성을 굳건히 해주는, 가상과 가짜는 현저히 다른 개념임을 알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메타버스는 가짜 공간이라고?!

최근 1년 이내 한국에서 진행한 동시대 작가의 전시 2가지를 선정해 작품 속에서 앞서 언급한 플라뇌르 개념이 어떻게 가상과 가짜를 구분 짓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2≫, <코코 킬링 아일랜드>, 크립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 크립톤, <식도락 투어>, 2022, 3D 퍼포머티브 장치, 가변크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토리얼 콜렉티브 크립톤은 가상의 관광지 <코코 킬링 아일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 섬은 기후 변화로 인해 코코넛과 감귤 등 열대 과일이 지역 특산품이 될 수 없는, 장소성이 사라진 오늘날의 풍경을 은유하는 곳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논하는 아고라 적 기능을 하는 가상 공간입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생태학적 접근과 철학적 개념은 포석정, 관광안내소, 푸드코트와 같은 실재에 기반한 장소와 XR 기술로 제작된 웹과 스크린 기반의 ‘비물질’로 결합합니다.
작품 중 하나인 <식도락 투어>에서는 직접 목적지를 선정하여 아일랜드를 탐방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달리, 큰 액션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 섬나라를 정처 없이 거닐며 기술이 낳은 거대한 분홍빛의 산호초 섬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깰 퀘스트도, 깎이는 수명도 없습니다. 특별한 과업 없이 작품 속 산책자가 된 관객은 실감 미디어 너머로 대체 특산품을 생산해 내는 가상 섬 주민들을 관찰하며 노동과 자본에 대한 고찰을 이어 나갑니다. 마치 둥둥 떠다니듯 AI의 목소리를 따라 섬을 산책하다 보면, 코코 킬링 아일랜드의 물리적 주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상 관광 안내소를 방문해 전복회의,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 출품작 등을 관람하며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체험을 통해 제작자나 전문가가 고려하기에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험을 하고, 코코 킬링 아일랜드의 존재성을 더욱 굳건히 체득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를 어떤 순서대로 산책할 것인지는 오롯이 개인의 몫입니다. 규칙, 로드맵, 튜토리얼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 공간에서 작품 사이를 익명으로 거닐며 항해해 보도록 합시다. 과거 플라뇌르의 필수 조건이었던 물리적 이동성을 가상 공간에 접목하여 산책하다 보면 가상 공간이 더 이상 가짜 혹은 현실의 모방이 아닌 또 다른 실재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로탕 도산 ≪일루미나리움≫, Emma Webster

출처: W 매거진 작가 인터뷰
두 번째 작품은 엠마 웹스터의 회화 작품들입니다. 프랑스계 갤러리 페로탕이 강남 도산에 문을 열며 아시아 최초로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영국계 미국인 작가인 그는 아주 독특한 작업 방식을 가졌습니다. VR을 통해 디지털 풍경을 생성하고 그 장면을 실제 캔버스에 옮깁니다. 기존의 XR 기술을 이용한 뉴미디어 아트와 달리 모든 부분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빛을 ‘시각적 미끼’라는 태도로, 연출된 조명을 통해 생략과 묘사를 반복한 후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 위에 입체적 공간을 새롭게 풀어냅니다.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익숙한듯 알수없는 형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무언가 보일 듯 말 듯 한 그의 그림은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덩이, 동굴, 덤불과 같이 시각적 제한이 있는 공간이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의도된 미스터리라 볼 수 있습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눈속임, 왜곡적 묘사 등을 통해 가상 현실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매우 유사함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걸으며 둘러보는 주변이 곧 space이자 place이고, 또 site이며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것이 외부인지는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Emma Webster, <Blue Moon>, 2022, Oil on linen, 152.4×213.4 cm, Courtesy of Emma Webster and Perrotin
작가는 VR 기기인 오큘러스 퀘스트로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를 스스로 창조해 낸 세계 속에 얽혀 들어가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의도된 스토리라인 없이 공간을 제작하며 세계와 하나 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세계를 플라뇌르가 되어 돌아다니다 보면 인간 역시 풀, 나무,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싼 것과 같은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는 가상 공간에서는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 힘들 때도 많은데, 이때 풍경화는 기초 교육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금 자연과 공간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며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멜랑콜리아를 느끼고, 내가 중력을 느끼는 물리적 공간으로부터 멀어지며 가상 공간을 자신만의 서사로 채우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림자나 반사광 같은 뉘앙스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없을 때 기술은 그의 ‘의안’이 되어준다고 표현합니다. 빛, 초점 등을 자유롭게 이용해 산책하듯 가상 공간을 다듬어 나갑니다. 인간의 흔적을 찾아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기존에 우리가 현실에서 배운 인과관계가 비틀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스케치를 스캔한 후 VR로 블렌더 렌더링 등으로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를 만들거나 원근법을 무시하는 가상 공간 속 디지털 조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과학과는 다른 새로운 가상 공간 속 합리성을 체험하며 디지털 플라뇌르로써의 경험을 쌓아 나가게 됩니다.

메타버스를 산책하는 법

에르메스 재단 총괄 아트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는 ‘도시는 거니는 행위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이다’라 말했습니다. 메타버스 속에서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가? 목적을 가진 행동만이 가상 공간을 또 다른 실재로 만들어 주는가? 한번 반문해 보길 바랍니다. 울적한 날 무작정 한강 변을 걷는 것, 에너지가 넘치는 날 일단 밖으로 나가보는 것처럼 메타버스가 현실을 처리하는 또 다른 편안한 장소가 되었을때 비로소 완벽한 공간적 기능을 할 것입니다.
멀리 있는 동료와 회의하러 혹은 게임을 하러 시간을 정해 가상 공간에 접속해 보는 것도 좋지만, 산책하듯 가상 세계를 돌아다녀 보는 것이 어떨까요? 파리 여행을 가면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뉴욕에서는 센트럴 파크에서 산책을, 하노이에서는 넓은 도로를 무작정 가로지르는 것처럼 메타버스 속 세계를 현지인처럼 산책해 본다면, 새로운 공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스트 미디어 시대, 디지털 플라뇌르라는 신인류로 다시 태어나 탈경계적 이동을 거듭할수록 가상 공간이 단순한 현실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작성자: 김지영
[참고자료]